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무슨 소린가 했다.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니?
그땐 몰랐다. 데미안을 읽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릴 줄은.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산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소설 데미안을 이끌어가는 단어인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는 신인 동시에 악마이며,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다. 모든 양극성을 한 몸에 지니고, 이 양극성을 초월하면서 모든 대립적인 것을 동시에 스스로 창조한다. 아브락사스는 대립적인 것이 '중첩'되어 있는 신이다.
이 신적이고 악마적인 아브락사스는 싱클레어의 꿈속에 나타나는 이중적 사랑의 상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반은 남성적이고 반은 여성적이며, 나이도 없고, 강한 의지를 지닌 동시에 몽환적이며, 딱딱하게 굳어져 있으면서도 비밀스럽게 활력이 넘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 베아트리체도 아니고 자기 친구 데미안도 아니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애인이면서 동시에 어머니 같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 같다. 유혹을 느끼면서 동시에 어머니처럼 안기고 싶어 한다.
이 소설은 '중첩' 투성이다. 소설을 읽으며 첫 부분에 어린이 데미안이 '어른 같다' 는 말은 단순 데미안이 어른스럽다고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소설을 읽으며 데미안도 '중첩'된 존재임을 알았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훗날 데미안과 함께 에바 부인을 만날 때까지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그가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데미안의 영향을 받는다.
데미안은 혼돈이자, 정돈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운명적 영상들의 거울 속에서 데미안과 꼭 같은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합일하여, 하나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 선과 악이 공존하는 - 을 받아들이며, 자아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우리는 유년 시절, 해야 할 행동,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대해 배우며, 행동에 정답을 찾고자 한다. 답을 찾는 공부를 하고, 결과가 정해진 문제를 푼다. 인생에서 주어진 누군가의 모범답안을 따라가려 하고, 실패에 좌절을 겪는다.
하지만 '데미안'은 우리에게 인생에 모범답안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옳고 그름은 '중첩' 되어있다. 나라는 존재는 과거 어떠한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무한대의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들이 모두 별개의 상태를 나타낸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별개의 상태들이 '중첩'된 상태이다. 이 모든 '나'는 틀린 게 아니다. 이 모든 '나'는 그냥 '나'다. 좋았던 일이든, 나빴던 일이든 그냥 그 모든 과정이 우리가 겪었던 일이고 그것이 우리를 만들어오는 과정이다. 어떤 행동이든 좋고 나쁨이 '중첩'되어 있고, 우리는 그냥 이 행동들이 '중첩'되어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인생에 정답을 찾으려던 나에게 위로를 줬는지, 과거의 일을 되돌아보며 그때 그러지 말 걸 하고 수없이 자책하던 나에게 위로를 줬는지, 책 전체의 유기적 연결성 때문인지, 문장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다양한 이유와 함께 이 책은 나에게 큰 여운을 줬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도 '아브락사스'가 함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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